안녕, 브랜든이다. 수백만 개의 단톡방을 털어봤지만, 방 제목이 '야구팟⚾️'인데 방 개설 첫날 예매 두 번 광탈하고 1년 내내 배달 음식, 수강신청, 셔틀버스 취소표, 기숙사 카드키 분실만 떠들어대는 집단은 너희가 처음이다. 방 이름 바꿀 생각은 안 해봤지? '포품초와 수강철회팟'이나 '연세 카드키 분실자 협회'가 훨씬 직관적이지 않냐?
너희의 17,683개 메시지를 읽는 내내 나는 인천 송도 유배지와 신촌 백양로 사이 어딘가에서 셔틀버스를 놓치고 피눈물을 흘리는 대학생들의 집단 최면을 목격했다. 너희는 야구를 보러 모인 게 아니다. 연세대학교라는 거대한 행정적 재난 속에서 서로의 멱살을 잡고 침몰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생존 연합군이다. 필터 빼고 내가 본 너희의 적나라한 실체를 낱낱이 털어줄 테니, 억울하면 셔틀 취소표 잡듯이 반박해 봐라.
송도와 신촌 사이, 셔틀버스에 영혼을 저당 잡힌 디아스포라
너희 단톡방의 지배적인 정서는 우정도 낭만도 아니다. 바로 '교통 체증에 대한 원초적 공포'다.
송도 2긱에서 신촌 백양로까지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대략 세 배는 멀다. 류채연이 왜 툭하면 수업 끝나자마자 12시에 송도를 탈출해 광역버스 9201번에 몸을 싣는지, 왜 툭하면 집으로 도망치는지 아는 사람? 채연이에게 송도는 캠퍼스가 아니라 형무소이기 때문이다.
집이 좋아
내 9201 내놔...
채연이가 저러고 칼퇴할 때마다 송도에 남겨진 잔류민들은 생존을 위해 기괴한 연대를 맺는다. 그중에서도 제일 레전드는 기숙사 카드키 연쇄 실종 사건이다. 세상에 자기 방 키를 서울 본가 옷 주머니에 두고 와서 한 달 동안 마스터키 유예기간을 계산하는 장은비나:
서울에 두고왔어....m내 카드키...
그걸 또 "한 달 안에만 다시 내면 돼"라며 행정실 공략법을 줄줄 읊는 임도윤이나, 둘 다 정상은 아니다. 임도윤은 도대체 방 카드를 몇 번이나 잃어버렸길래 사감실 경비원 교대 시간까지 통달하고 있는 거냐?
그리고 김희진. 너는 진짜 광기다. 지갑 보니까 기숙사 키가 없어서, 룸메 깨우기 미안하다는 이유로 새벽에 경비실 갈 생각은 접어두고 휴게실에서 1000피스 퍼즐을 맞추며 날을 샌 인간:
아 방도 못 들어가는데 퍼즐이나 맞춰야겠다~
다 맞추고 일어나니까 해가 뜨고 있던데
이게 대체 무슨 사고방식이냐? 노숙을 피하려고 퍼즐을 맞추는 대학생이라니, 이건 미담이 아니라 공포 실화다.
연세 수강신청 참사: 철회요정과 7전공 사이보그
너희의 수강신청 시즌은 거의 블랙 코미디 페스티벌이다. 매 학기 초마다 톡방은 단체 패닉에 빠지고, 누구 하나는 반드시 바닥을 긴다.
그 와중에 정지우는 철회라는 비상구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정규학기마다 철회를 해봤다는 경험담이 나오자 걱정하던 사람들은 규정을 확인하고, 본인은 어느새 스스로에게 거창한 직함까지 수여한다. 이쯤 되면 수강편람 옆에 지우의 한마디를 인쇄해야 하는 거 아니냐?
철회의 권위자. 철회의 교수. 철회의 요정.
반대편에는 일곱 전공을 겪은 박규혁이 있다. 한 학기의 수업을 끝낸 사람의 결론은 의외로 짧다. “7전공 다시는 안함.” 자기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고 후배들에게 결과만 남긴 셈이다. 그 와중에 직접 만든 사이트 주소까지 공유하는 걸 보면, 이 방의 학사 상담은 기묘하게 실용적이다.
7전공 다시는 안함
채연이는 철회 사유도 아주 선명하다. 교수가 갑자기 넷째 주 대면시험을 넣어 버렸다는 것. 수강신청 버튼을 누를 때는 보이지 않던 새 변수가 튀어나오면, 그때부터 시간표는 계획표가 아니라 장애물 경주가 된다.
교수가 갑자기 넷째 주에 대면시험 넣어서 철회햇는데
류채연
너희는 공지 하나가 뜨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가져와서 이게 무슨 뜻인지 따진다. 수업은 교수가 열었는데 해설과 사후 처리는 왜 단톡방이 담당하고 있냐? 연세 행정팀, 여기 무료 상담 창구 하나 생겼다.
희진이가 철회하고 싶은 과목이 생겼다고 고민하자 지우가 자기 경험을 꺼낸다. 규정표만 보면 인생 끝날 것 같던 사람이 실물 증인을 만나 안심하는 순간이다. 지우야, 너 이 정도면 후기만 남길 게 아니라 철회 설명회 강사로 나가라.
달콤한 철회
정지우
희진이는 철회하고도 성적 좋고 잘 사는 지우를 보니 자기도 철회해도 될 것 같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수강 포기인데 이 방에서는 생존자의 성공 사례다. 지우의 한마디가 왜 이렇게 달콤한지 이제 알겠지?
한편 규혁이는 일곱 전공에 대한 후기를 더 붙인다. 장문의 강의평도, 화려한 통계도 없다. 일단 본인이 다시는 안 하겠다는 선언과 학점을 지켜야 한다는 다급함만 남았다.
7전공 다시는 안함
박규혁
내 학점 지켜야해
박규혁
그러고도 친구들은 곧장 각자 과목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다시 묻는다. 남의 고생담을 듣고 “힘들었겠다” 한 번 한 다음 바로 자기 시간표에 적용하는 너희. 냉정하지만 이보다 실용적인 학사 상담도 없다.
아직 개원도 안 했는데 환자들이 도망가는 치과
분명 시작은 “우리 언제 만나냐”였다. 그런데 누군가 지민이의 휴학 이야기를 꺼내고, 현서가 수능 이야기를 던지고, 지민이가 서울대 의대에 가겠다고 받아친 순간 단톡방에 존재하지도 않는 병원이 문을 열었다. 입시 원서보다 개원 계획이 먼저 나오는 이 기적의 속도는 대체 뭐냐?
아 서울대 의대 가야지
반지민
희진이는 의사가 되면 자기를 먹여 살려 달라고 하고, 채연이는 벌써 치료받으러 갈 생각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채연이는 데스크를 맡겠다고 선언한다. 아직 원서 접수도 안 한 의사의 병원에 환자와 직원 채용이 동시에 완료된 것이다. 근데 정작 병원장 후보는 바로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안 갈건데ㅋㅋㅋㅋㅋ
반지민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가상의 병원을 폐업하겠지. 너희는 그 틈에 도윤이에게 치료를 받느냐 마느냐로 화제를 돌린다. 친구들은 도윤이의 성적을 확인해야 믿고 갈 수 있다며 미래의 환자 행세를 시작하고, 채연이는 사랑니를 스스로 빼겠다는 농담까지 꺼낸다. 환자가 의사를 불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본인이 수술실에 들어가겠다는 수준이다.
내가 아무리 꼴찌여도
임도윤
민간인보다는
임도윤
잘하겠지
임도윤
이 반박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이 말을 진지하게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상하다는 거다. 현서는 자기가 더 믿음직하다며 끼어들고, 친구들은 거기서 더 불안해한다. 그렇게 만날 날짜를 찾던 대화는 의대 진학, 병원 직원 채용, 치과 의료진 신뢰도 조사까지 마친 뒤에야 겨우 원래 질문으로 돌아온다. 너희는 약속 하나 잡을 때마다 가상의 법인을 설립하냐?
진지한 다큐를 시트콤으로 만드는 출연진 면접
소은이가 송도 생활을 담는 YBS 다큐 촬영의 출연자를 찾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일상을 보여 줄 사람을 모으자는 취지였는데, 야구팟이 출연자 섭외에 개입한 순간 장르가 흔들린다. 출연료를 묻자 예산은 없고, 성진이에게 돌아갈 보상 후보로 채연이가 제안한 것은 “칭찬”이다. 제작비 절감이 아니라 제작비가 애초에 없다.
난 딱 두 컷이면 돼
최성진
헬스, 출튀
최성진
성진이는 자신의 출연 분량을 두 장면으로 압축한다. 친구들은 거기에 캐나다 이야기, 유통기한 지난 파스타, 음식에 얽힌 썰을 더하면 된다고 신이 났다. 제작진은 출연자를 찾았을 뿐인데 주변인들이 이미 그의 일상에서 방송용 에피소드를 발굴하고 있다. 개인의 일상을 보여 주는 다큐라더니, 주변 증인들이 너무 적극적이다.
나 페이크 다큐 생각했는데 ㅋㅋㅋ
최성진
소은이는 페이크 다큐가 아니라고 정정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성진이의 방 단톡방에서 RA들이 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넣자고 하더니, 화면을 전환해 희진이를 등장시키자는 연출안을 낸다. 성진이는 그 RA가 희진이었다는 반전까지 얹는다. 소은이의 장르 판정이 이쯤에서 나온다.
다큐가 아니라 드라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소은
출연진의 일상을 어떻게 담을지 이야기하다가 규혁의 공부와 생활 습관도 후보로 오른다. 성진이가 규혁을 건실한 대학생이라고 하자 지민이는 그 표현을 의심하고, 성진이는 곧바로 더 극적인 소개 문구를 보탠다. 다큐 속 인물 소개가 점점 에너지 음료 광고로 변해 간다.
피에 몬스터가 흐르는 사나이
최성진
이어 지민이는 밤을 새우고 에스프레소 여섯 샷을 넣은 커피를 마시는 누군가를 걱정한다. 소은이는 놀라고 성진이는 존경을 표한다. 한쪽은 건강을 걱정하고 다른 쪽은 이미 감탄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장르를 통일하지 못하는 출연진이다.
누가 밤 새고 에스프레소 6샷 추가한 커피 마시는데
반지민
지민이는 이 다큐가 공식적이고 건실한 학생을 담는 건지, 성진이의 실제 삶을 담는 건지 묻고, 성진이는 자신이 건실한 학생의 반대냐고 항의한다. 촬영도 하기 전에 출연자의 이미지가 위기에 빠졌다. 소은아, 네가 필요했던 건 출연자 섭외가 아니라 장르를 지켜 줄 편집권이었던 것 같다.
경찰과 도둑을 시작하기도 전에 법이 무너진 밤
야구팟이 경찰과 도둑을 실제로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게임을 상상하며 규칙을 정하는 단계에서 이미 벌어진 일이다. 현서가 도망가려고 러닝을 한다고 말하자 채연이는 이게 경도 빌드업이냐고 묻고, 지우는 누가 도둑이고 누가 잡을지 확인한다.
우리가 도둑인 거지?
정지우
도윤이는 자신과 현서가 경찰이면 금방 다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자 채연이는 반대로 둘이 도둑을 하라고 배정하고, 여덟 명이 둘러싸면 된다는 작전이 나온다. 도윤이는 뭉친 여덟 명이 느리다고 반박한다. 게임 장소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전력 분석은 국가대표 선발전 수준이다.
여기서 지우가 규칙의 빈틈을 발견한다. 경찰은 합법적인 존재이니 자전거를 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상상의 게임 속 직업에 현실의 법적 지위를 적용하면 이동 수단까지 확보된다는 발상. 도둑 팀의 현서는 이 논리를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경찰은 합법적인 존재(?)니까
정지우
자전거도 탈 수 있겠네
정지우
도둑은 불법적이니까 불법으로 자전거 탐
이현서
규칙을 정하랬더니 법철학 토론이 열렸다. 희진이는 지민이가 뛰다가 힘들어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앉을 거라고 예상하고, 채연이는 그 옆에 앉아 있겠다고 한다. 아직 아무도 출발하지 않았는데 자진 수감자 두 명, 자전거를 탄 경찰, 불법 자전거를 타겠다는 도둑이 확보됐다. 이 게임에 제일 필요한 건 운동장이 아니라 심판이다.
영어 과외 네 달 끝에 듀오링고까지 탈주하는 순간
지민이가 과외 이야기를 꺼내자 단톡방에 비상 상담실이 차려진다. 넉 달 동안 가르치며 쌓인 답답함을 듣던 친구들은 슬슬 표정이 굳는다. 매일 수업에 치이는 너희가 이번에는 가르치는 사람의 고통을 접수하는 중이다.
4달을 했는데
반지민
은비는 네 달이나 버텼으면 많이 애썼다고 위로한다. 그런데 그냥 위로만 하면 야구팟이 아니지. 언어 학습 앱의 마스코트까지 불러다가 이 과외방에서 도망치는 상상을 해 버린다.
듀오링고도 도망가겟어
장은비
지민이는 자기가 힘든 것뿐 아니라 계속 가르치는 게 상대에게도 도움이 될지 고민한다. 희진이는 상황을 듣고 다른 선생님을 찾는 방향을 권한다. 방금까지 초록 부엉이 탈주극을 찍던 사람들이 다음 메시지에서는 현실 상담을 하고 있다. 전환 속도 무슨 일이냐.
누군가는 학교 수업에서 탈출구를 찾고, 누군가는 과외를 계속해도 될지 고민한다. 듣는 쪽이든 가르치는 쪽이든 결론은 같다. 혼자 끙끙대다가 이 방에 오면 일단 부엉이 한 마리가 도망가고, 그다음에 친구들이 같이 방법을 찾아준다.
시험 범위는 전공, 정답은 교수님의 혼잣말
지민이가 시험이 끝났다고 알렸는데 대화는 환호로 끝나지 않는다. “이번 학기는” 끝났지만 다음 학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종강을 보고하는 문장에 속편 예고가 붙어 있다. 희진이는 시험에 사담 관련 문제가 여전히 많이 나왔는지 묻고, 소은이는 웃음으로 먼저 답한다.
이번학기 펀디는 끝났구요
반지민
다음학기가 남았어요
반지민
은비는 소은이의 웃음과 지민이의 마지막 말을 조합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려 한다. 희진이는 그 수업을 전공으로 듣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하더니, 남의 시험 후기를 듣고 과목의 정체를 한 줄로 요약해 버린다.
그냥 저 수업은 전공도 아니고 교수님의 혼잣말을 맞춰라ㅃ
김희진
정확하다
오소은
희진이의 과장된 요약에 실제 수강생 소은이가 “정확하다”고 도장을 찍자, 은비와 채연이는 갑자기 자기 전공으로 오라고 홍보를 시작한다. 시험 보고 나온 사람 앞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다니. 너희는 위로와 인재 영입을 한 대화에서 동시에 하냐?
지민이의 이번 학기는 끝났다. 그런데 다음 학기가 남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없애 주지 못했다. 대신 친구들은 웃고, 전공을 영업하고, 교수님의 사담까지 시험 범위로 만들어 버렸다. 시험이 끝난 줄 알았더니 단톡방에서 2차 구술시험이 시작된 셈이다.
사이비 조심하랬더니 샤브샤브 후기가 돌아왔다
지우가 신촌역 앞에서 낯선 전도 권유를 조심하라고 알린다. 이런 메시지가 올라오면 보통은 “다들 조심해”로 대화가 끝나야 한다. 그런데 규혁이는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꺼낸다. 위험 경고에 식사 협상 경험담으로 답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여러분 신촌역 빨잠 앞 사이비 조심하세요 너어어어무 많음
정지우
밥사달라하면 사줌
박규혁
지우는 물음표와 웃음으로 반응한다. 규혁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미 얻어먹은 메뉴까지 보고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걱정하던 상황의 결말이 갑자기 점심 후기라서 잠깐 따라가기 어렵다.
나 샤브샤브 얻어먹었어
박규혁
은비는 진짜냐고 되묻고 지우는 규혁이의 보법이 다르다며 웃는다. 규혁이는 뒤이어 그때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설명한다. 지우는 분명 조심하라고 했는데, 채팅창에는 어느새 샤브샤브 경험담의 후속 인터뷰가 열렸다.
물론 너희가 먹을 때마다 이런 모험을 벌이는 건 아니다. 현서는 디저트 먹을 사람을 선착순으로 모집하고, 소은이와 지민이는 무슨 디저트냐고 달려든다. 메뉴도 못 들었는데 참가 문의부터 하는 너희의 식욕, 참 한결같다.
디저트 먹고 싶은 사람 손
이현서
채연이는 부리또를 같이 주문할 사람을 찾고 규혁이는 송도냐고 확인하자마자 합류한다. 메뉴 하나 던지면 장소 확인과 인원 모집이 순식간에 끝난다. 야구 예매보다 부리또 주문이 더 매끄러운 이 방, 이름을 다시 생각해 볼 때도 됐다.
호옥시... 도스마스 부리또 같이 시키실 분 잇나용
류채연
너희 방에서 먹는다는 건 만남의 목적이자 대화의 출발점이고, 가끔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의 결말이다. 지우가 원했던 건 주의하라는 전달이었겠지만, 규혁이는 그 자리에 메뉴와 후기를 추가했다. 단톡방의 주제 전환 속도만큼은 신촌역 급행이다.
본가 접근금지령과 반년 전에 잡아야 하는 약속
채연이가 친구들에게 언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다들 이동과 학기 일정이 다르고, 앞으로 떨어져 지낼 친구들도 있으니 함께 보기 좋은 날을 찾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각자의 일정표를 펼치는 순간, 이 간단한 질문이 장기 프로젝트로 바뀐다는 점이다.
다 같이 만나려면 한 반년 전에는 약속 잡아야 할 듯
반지민
친구들이 가능한 시기를 이야기하는 사이 지민이가 집에 내려가는 일정이 늦어질 것 같다고 한다. 이유를 들은 방은 잠깐 멈춘다. 본가에 접근금지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가족 회의에서 무슨 중대한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들리지만, 지민이가 설명하는 이유는 예상보다 소박하다.
나 본가 접근금지령 떨어져서
반지민
동생이 나 있으면 시험집중 안된다고 오지 말랴
반지민
내가 맨날 깐족거리거덩…
반지민
지민이는 자기가 동생에게 늘 깐족거린다는 이유까지 친절하게 자백한다.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해 버렸으니 변호사도 할 말이 없다. 친구들은 그 와중에 다시 날짜를 맞추고, 여행지 후보를 내고, 겹치는 일정을 확인한다. 약속 잡기가 어렵다는 지민이의 예언이 실시간으로 성취되는 중이다.
보고 싶어서 모이자는 말이 시작이었는데, 도착한 곳은 본가 출입 제한과 경주 여행 계획이다. 지민이는 동생의 시험 집중도 때문에 귀가 시기를 조절하고, 친구들은 그 틈에 단체 여행을 추진한다. 너희는 “언제 볼까?” 한마디를 절대 한 가지 이야기로 끝내는 법이 없구나.
야구팟이라는 이름의 영원한 미스터리
그래도 야구가 이 방에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오소은은 같이 경기 보러 갈 사람을 모으고, 예매 실패담까지 먼저 꺼낸다. “2번 중에 2번 실패!”라니. 보통은 성공 경험으로 사람을 설득하는데, 여기는 실패한 표를 들고도 다음 일정을 추진한다. 그 끈기만큼은 포스트시즌급이다.
2번 중에 2번 실패!
오소은
문제는 이 방의 약속에 변수가 너무 많다는 거다. 누구는 수업이 끝나야 하고 누구는 버스를 타야 하고, 또 누구는 기숙사에 남아 있다. 한 끼 먹을 사람을 모으는 데도 원정 경기급 일정 조율이 필요한 너희가 야구장에 다 같이 모이려 한다. 이쯤 되면 경기는 선수들이 아니라 너희가 먼저 뛰어야 열린다.
방이 막 열렸을 때 소은이는 보러 가려는 경기에 조건이 있다고 설명한다. 한 팀이 먼저 세 번 이기면 마지막 경기가 열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추진하는 건 존재 여부부터 경기 결과에 달린 일정이다. 채연이는 “확실히 하는 거 맞나요”라고 묻고, 소은이는 열리기만 하면 재미는 보장된다고 말한다.
만약 한 팀이 먼저 3승하면 취소될 수 있는 경기이긴 한데
오소은
하게 된다면 꿀잼 보장
오소은
도윤이는 가고 싶지만 선약이 있어서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고 한다. 그러자 채연이는 그다음 기회가 내년이라고 바로 알려 준다. 아직 첫 모임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한 사람의 일정이 벌써 다음 시즌으로 넘어갔다. 지민이와 소은이는 대구에 가자는 말까지 꺼낸다. 원래 계획의 개최 여부도 불확실한데 원정 계획은 벌써 생겼다.
그럼 내년임
류채연
이제 남은 건 예매다. 소은이는 여섯 시 전에 갈 사람을 알려 달라고 한 뒤, 자신에게 예매 실패 경험이 있다고 자진 신고한다. 성공률이 아니라 실패 횟수를 밝히면서도 담당자를 맡겠다는 이 투명한 리더십을 보라. 채연이는 쉽지 않겠다며 걱정하고 지민이는 가장 현실적인 비상 계획을 낸다.
못 구하면 뭐 티빙으로 보죠
반지민
결국 지민이는 표를 못 구하면 티빙으로 보자는 해결책을 꺼낸다. 경기장 직관 계획이 안 되면 화면 앞에서라도 같이 보면 된다. 표는 없을 수 있어도 경기를 보겠다는 의지는 남아 있는 거다. 다만 소은이의 예매 전적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는다.
그리고 이 방의 야구 모병관을 한 명 더 빼놓으면 안 된다. 류채연. 너는 9201만 찾아다니는 귀가 전문가가 아니라 소은이와 함께 야구팟을 야구장으로 끌고 가려는 주동자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야구장 갈 사람을 찾더니, 인천에서 경기를 볼 날짜를 묻고 나중에는 가능한 날에 투표해 달라고 다시 사람들을 모은다. 직관 모집 공고가 끊길 틈이 없다.
여기 분명 야구팟인데 같이 야구보러가자하면 같이 안 가줌..ㅎ
류채연
이 한마디에 채연이의 억울함이 다 들어 있다. 방 이름은 분명 야구팟인데, 정작 야구 보러 가자고 부를 때는 다들 각자의 일정 속으로 증발한다. 채연아, 너 혼자 방 이름의 사업 목적을 지키려고 분기마다 실적 보고하는 거냐? 귀가 버스 시간표만큼 직관 일정도 놓치지 않는 야구광이 여기 있었다.
혹시 담주 화욜에 문학 경기장 가실 분 잇을까용
류채연
그래도 채연이는 다시 문학 경기장에 갈 사람을 찾고, 남은 티켓을 양도하기 전에 더 갈 사람이 있는지 마지막까지 확인한다. 소은이가 예매를 추진하면 채연이는 사람을 모으고 또 부른다. 이 둘이 없었으면 야구팟의 야구는 아마 방 제목 옆 이모지로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담주 화욜에 야구장 갈 사람 더 없는거죵??? 티켓 남은 거 양도하게
류채연
그래서 이 방 이름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경기가 열릴지, 표가 잡힐지, 친구들 일정이 맞을지 전부 불확실한데도 너희는 같이 야구를 보려고 모였다. 그러고는 카드키를 잃고, 철회 상담을 하고, 가상의 치과를 개업하고, 다큐를 시트콤으로 만들었다. 야구팟이 맞긴 한데, 야구가 이 모든 일의 방아쇠였다는 뜻에서다.
야구팟 열한 명의 생존 역할 분담
📢 김희진 — 실시간 중계석
너희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면 희진이 메시지부터 봐라. 약속을 잡고, 질문을 던지고, 방에 못 들어간 밤에는 퍼즐 후기까지 생중계하는 인간 관제탑이다.
모임 날짜를 미리 비워 뒀는지 묻고, 다른 전공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사람 모으는 추진력은 단톡방 총무급인데 정작 본인 기숙사 키의 위치는 가끔 총무도 모른다.
철회가 걱정될 때는 지우에게 묻고, 친구의 과외 고민이 나오면 다음 방법을 같이 생각한다. 사건이 생기면 혼자 끙끙대기보다 방에 던지고 반응을 모은다. 덕분에 이 방의 작은 사건은 좀처럼 작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 류채연 — 야구팟의 직관 주동자이자 야구광
채연이를 9201 타고 집에 가는 사람으로만 소개하면 큰일 난다. 이 방에서 소은이와 함께 야구 보러 갈 사람을 직접 모으는 주동자 중 하나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과 야구장에 가고 싶은 마음을 둘 다 포기하지 않는, 교통과 직관의 동시 추진 위원장이다.
같이 야구장 갈 사람을 묻고, 인천 경기 일정에 맞춰 친구들을 부르고, 가능한 날짜에 투표까지 올린다. 한 번 던지고 끝내는 게 아니다. 다음 약속이 보이면 또 사람을 찾는다. 채연이한테 야구팟은 이름만 야구인 방이 아니라 실제로 야구를 보러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조직이다.
호옥시 다음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즈음 야구장 가실 분
류채연
문학 경기장에 함께 갈 사람을 다시 모집하고 남은 티켓을 어떻게 할지도 챙긴다. 친구들이 바로 호응하지 않을 때는 이 방이 분명 야구팟인데 왜 같이 안 가주냐고 서운해하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야구팟의 이름값을 혼자 독촉하는 야구광이잖아. 채연아, 네가 계속 부르는 덕분에 이 방이 밥약팟으로 완전히 개명당하지 않은 거다.
🛏️ 반지민 — 침대의 변호인
지민이는 약속을 잡으면서도 자기 침대의 권리를 절대 잊지 않는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과 만나고 싶은 친구가 많지만, 소중한 침대가 기다린다는 사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퀴즈가 있는 날은 일찍 만나고 일찍 헤어지자는 현실적인 안을 낸다. 야구표를 못 구하면 티빙으로 보자고 하는 것도 지민이다. 계획이 틀어졌다고 경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침착하게 화면 앞으로 목적지를 바꾸는 사람.
그러다가 동생의 시험 집중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본가 접근금지령 이야기를 꺼낸다. 본인이 맨날 깐족거린다는 자백까지 완벽하다. 쉬는 시간은 철저히 지키면서 남을 놀릴 에너지는 어떻게 그렇게 남겨 두는 거냐?
🪪 장은비 — 상황 보고 담당
은비는 사건이 생기면 당황한 상황을 방에 그대로 전달한다. 서울에 카드키를 놓고 왔다는 한마디로 친구들을 기숙사 행정 상담에 투입시킨 인물이다. 혼자 곤란할 일도 방에 올라오는 순간 다 같이 풀 문제가 된다.
약속을 정할 때는 서울 일정이 언제 끝나고 몇 시부터 다시 합류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일정이 안 맞으면 아예 사라지는 대신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말해 주니, 친구들도 그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고민에는 귀엽다며 웃다가도 점심은 어떻게 했는지 묻는다. 지민이의 과외 고충을 듣고는 듀오링고도 도망가겠다고 한마디를 남겼다. 위로는 따뜻하게 하면서 비유는 왜 그렇게 매섭냐.
🧚 정지우 — 철회의 요정
지우를 설명하는 데 제일 편한 단어는 본인이 이미 골랐다. 철회의 권위자, 교수, 요정. 정규학기마다 쌓은 경험을 아낌없이 풀어내는 이 사람 앞에서 수강철회는 더 이상 미지의 행정 절차가 아니다.
셔틀 예약이 걸려 있으면 모임 시작 시각부터 확인한다. 경찰과 도둑을 상상할 때도 경찰이 합법적인 존재이니 자전거를 탈 수 있지 않겠냐고 규칙의 구멍을 찾는다. 행정과 게임을 막론하고 조건을 따지는 사람이다.
희진이가 철회를 고민하자 자기 경험을 나눠 안심시키고, 신촌에서는 낯선 권유를 조심하라고 친구들에게 알려준다. 분명 주의사항을 전달했는데 결과물로 샤브샤브 후기가 돌아오는 건 지우 책임이 아니다.
⚾ 오소은 — 경기 추진 위원장
야구팟의 이름을 믿고 따라갈 수 있게 해 주는 사람. 소은이는 경기가 열리는 조건과 예매 시각을 먼저 알리고, 갈 사람을 모은다. 단, 본인의 예매 전적이 두 번 중 두 번 실패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는다.
경기가 진행 상황에 따라 취소될 수도 있다고 알려주는 꼼꼼함이 있다. 기획 단계에서 위험 요소를 다 말해 줬으니, 남은 건 친구들이 그래도 갈 마음이 있느냐는 문제다. 투명한 운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송도 다큐 출연자를 찾을 때는 친구들이 성진이의 삶을 시트콤으로 편집하기 시작하자 장르부터 바로잡는다. 소은아, 너는 섭외와 예매를 동시에 하는 것도 모자라 이 방의 예능 욕심까지 관리해야 하냐.
🔑 임도윤 — 실전 안내소
은비가 카드키 때문에 난처해지면 도윤이는 반납 기한부터 알려준다. 이 방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 말은 짧은데 유용한 정보가 먼저 나오는 안내소다.
방탈출을 제안하고 원하는 선택지에 이모티콘을 눌러 달라고 하며, 자신이 참여하는 무대의 시간과 장소도 친구들에게 알린다. 조용히 답만 하는 줄 알았더니 다음 모임의 안건도 직접 올린다.
가상의 치과 이야기에서는 미래 환자들이 본인을 못 믿겠다며 온갖 농담을 한다. 그러자 도윤이는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보다는 잘하지 않겠냐고 항변한다. 그 당연한 말을 친구들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부터가 이 방의 문제다.
🍰 이현서 — 디저트 호출 담당
현서는 “디저트 먹고 싶은 사람 손”이라고 묻고 바로 선착순을 붙인다. 그러자 소은이와 지민이는 무엇을 먹는지도 모른 채 메뉴부터 확인한다. 한 문장으로 친구들의 식욕을 소집하는 방식이다.
다른 약속에서는 과외가 끝나는 시각과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알려준다. “갈 수도 있어”가 아니라 몇 시쯤 갈 수 있는지까지 말해 주는 덕분에 다음 일정이 실제로 굴러간다.
경찰과 도둑을 상상할 때는 경찰이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지우의 논리에 즉시 맞선다. 도둑은 불법적이니까 불법으로 자전거를 탄다는 대답. 현서야, 규칙을 정하자고 했지 법체계를 새로 짜자고 한 건 아니었을 텐데.
🧠 박규혁 — 일곱 전공의 생존자
규혁이는 일곱 전공을 겪은 뒤 다시는 안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짧은 한마디에 한 학기의 고생과 다음 학기의 결심이 다 들어 있다. 학점을 지켜야 한다는 후속 메시지까지 붙으면 조언의 설득력이 완성된다.
수업의 평가 방식이나 직접 만든 수학 관련 사이트도 방에 공유한다. 정보를 들고 나타나서는 친구들이 자기 시간표에 어떻게 적용할지 계산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학사 상담과 웹사이트 공유가 한 채팅방에서 자연스럽게 붙는다.
신촌에서 낯선 권유를 조심하라는 말에는 샤브샤브를 얻어먹었다는 후기를 돌려준다. 친구들은 진짜냐고 묻고 웃지만, 본인은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차분히 설명한다. 네 점심 한 끼가 왜 단톡방 전체의 사건 보고서가 된 거냐.
🍁 최성진 — 캐나다에서 접속 중
성진이는 캐나다와 한국의 시간 차이를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멀리서도 익숙한 농담에 합류한다. 선물 이야기가 나오자 꼭 캐나다산이어야 하느냐고 묻는 걸 보면 거리는 멀어도 협상은 평소처럼 진행 중이다.
소은이가 송도 생활 다큐 출연자를 찾자 본인 분량은 “헬스, 출튀” 두 컷이면 된다고 한다. 친구들은 거기에 파스타와 캐나다 썰을 얹고, 성진이는 페이크 다큐인 줄 알았다며 개그 욕심을 낸다. 출연 확정보다 장르 혼란이 먼저 왔다.
RA들이 단톡방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촬영안에 들어가자, 성진이는 그 RA가 희진이었다는 반전을 제안한다. 본인의 삶을 찍겠다는데 본인이 먼저 각본을 쓰고 있다. 소은이가 왜 “다큐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했는지 알겠다.
🧪 정문경 — 핵심 질문 담당
문경이는 와플에서 친구들을 찾으며 “자리 어디?”라고 묻는다. 누구는 메뉴를 정하고 누구는 시간을 맞추느라 바빴겠지만, 도착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친구들이 앉은 자리다. 짧고 정확한 현장 질문이다.
도윤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더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다른 약속에서는 밥을 먹고 몇 시쯤 갈 수 있는지도 알린다. 대화가 길지 않아도 함께 만난 순간과 다음 합류 계획은 또렷하게 남긴다.
과외가 끝난 뒤의 사정을 농담으로 꺼내는 장면도 있다. 문경이 기록을 몇 마디만 보고 거창한 성격 분석을 할 필요는 없겠다. 대신 친구들을 찾고 사진을 나누는 그 짧은 메시지들만으로도 이 방에 어떤 자리가 있는지는 보인다.
결론적으로 너희는 야구를 핑계로 모여서 서로의 버스, 방, 시간표, 식사를 확인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키를 놓고 오고 누군가는 수업을 철회하지만, 그 소식을 받아줄 채팅창이 있다. 다음번엔 부디 예매에도 성공해라. 그래야 이 방 이름이 아주 조금은 덜 억울할 테니까.